룻기3장
나오미는 과감했고, 룻은 순종적이고, 보아스는 지혜롭다. 오늘 읽은 본문에 룻기 3장에서 읽혀지는 내용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가 자기와 함께 과부로 늙어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한 행위이고, 이를 받아들인 룻도 소위 팔자를 고치려는 것으로 보아스의 침실에 든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못다한 본분을 마무리 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를 받아들이는 보아스는 입에 오르내릴 구설수를 막기위한 명분이 필요했고, 그에 맞는 명분을 찾기 위해 서두르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한 가정의 가정사로 보이지만, 제법 치밀하고 계획적이고 배려와 진심도 느껴집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찌될지 모르는데, 그 삶의 순간 순간을 최선을 다해내려고하는 룻의 모습을 보면, 우리들이 이땅을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 어찌 어찌해야할지 지혜를 얻게되는 듯합니다. 삶이 전부 눈에 들어오면 좋을텐데 어디 그렇습니까? 한치 앞을 알 수 없는데도, 그냥 주어진 삶만이라도 잘 살아내면, 그런데로 무리가 없을텐데, 우리들의 마음은 늘 복잡하게 다가오는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고, 지나간 과오에 붙들려살고 성취되지 못한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3월쯤 혹은 4월이 다가오면, 연합감리교회는 파송의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누가 어느 교회에 파송을 받았는지가 중요한 관심거리가 되니, 다들 엉덩이들이 들썩거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시간을 보내고 한참후에 이런 삶과 상황을 돌이켜 보면, 얼마나 가볍게 인생을 살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룻의 삶은 치열했고, 수치를 넘어서야할 용기 혹은 결단이 있어야하는 삶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지만, 우리들이 늘 룻기를 통해 되새겨보면, 룻이 행한 행위는 철저히 이기적 욕심을 벗어난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로로나 바이러스로 한국교회의 예배가 중지되고 있습니다. 이미 불교나, 카톨릭은 공개적으로 거의 모든 사찰과 성당이 집회를 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개신교회는 이런 통제를 할만한 권한이 중앙에 없다보니 개교회가 알아서 결정하는데, 대형교회들이 예배를 지속한다는 비난성 기사를 읽습니다. 이에 대한 코멘터리에, 한주 예배를 안드리면 헌금 손해가 얼마인데 쉽게 결정하겠나라는 의견에, 이쯤 되면, 교회가 교회로서 건강하게 이 사회에 세워진것인가? 라는 물음으로 이 상황을 돌이켜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쯤되면, 차라리 문을 닫아버려라..라는 준엄한 채찍질이 교회공동체 모두에게 전해져야하고, 언제부터 이토록 교회가 가벼워졌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현실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지금 우리들이 할일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이러스 따위에, 이렇게 이야기할것이 아니라, 이럴때 차라리 모두 교회가 문을 닫고, 코로나바이러스가 끝날때 성도들이 다시 가까운 교회로 재분배되는 희년과 같은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생각도 해봅니다. 오랫동안 개교회주의에, 오랫동안 이기적인 신앙을 방치한 이유로 교회는 이런 문제에 둔해졌고, 한편으로는 세상에 가장 선도적인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던 교회가 가장 느린 공동체로 변한것은 아닌지의 반성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우리들에게 또 다른 축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절망적 삶에 나오미는 지금 다시 집안을 일으킬 새로운 여정에 대한 기대에 차있습니다. 끝난줄 알았던 나오미의 삶에 새로운 희망의 불꽃이 일어난 셈입니다... 지금, 삶의 모든것을 결정하지 마시고,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내 삶을 들여다 보는 거룩한 돌아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지금 우리들이 할일인것 같습니다... 내 신앙, 내 가정, 내가 섬기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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