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들리는 소식으로 마음을 정하는 것은 어리석지만, 여호수아서에서는 들을 소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정하는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생라합도 그렇고 오늘 본문에 아모리 족속도 그렇고 들려오는 소식에 간담이 서늘했다는 표현은 눈으로 보지 않고도 단지 들음으로 확신을 가지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는 것"이라는 새벽설교를 전했지만, 이런 해석은 말그대로 "믿음"에 대한 강조에 방점을 두는 것 뿐 실제로 들어서 믿음이 생기신분들이 얼마나 있는 궁금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서는 들어서 하나님을 위대하다고 고백하는 이방인들이 등장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여러가지 장치들을 소개합니다. 유월절도 그렇고 어제 읽은 4장에 돌탑도 그렇습니다. 조금 꼬아서 보면, 이스라엘은 늘 어떤 표징이 있어여 믿음을 이어가지만, 이방인들은 들음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간간히 이런 이방인들을 소개함으로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신앙의 긴장을 소개하는 것 같습니다. 화요일 마다 성경공부를 하는데, 늘 우리들에게 질문되어 지는 이야기는 "관계"에 대한 물음입니다. 사람관계가 쉽지 않고, 마땅히 그 관계를 잘 유지해야하는데 만만치 않은 감정소비가 늘 스트레스인것 같습니다. 이런 관계의 설정은 늘 기독교인이라는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오기때문에 늘 "내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마련인데, 이것도 어쩌면,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단정적 삶은 여러가지 리스크가 있습니다. 이미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감격스럽게도 하지만, 나태하게도 하고, 이미 포기할정도로 흔들린 삶이 어느순간 신앙의 중심에 우뚝설수 있는것이 신앙인것 같습니다. 신학교시절, 이 친구는 정말 훌륭한 목회자가 될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순간 다른 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혹은 목회를 중간에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이런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단정적인 사고는 리스크가 많구나... 구약성경을 읽을때 늘 느끼는 것은 참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야기들은 결국 불안함으로 결론을 맺고, 불안정한 삶을 들어서 사용하사는 하나님의 손길은 경이롭습니다. 이것을 거울 삼아 지금 현재의 삶의 우리들의 신앙을 들여다 보는 것은 마치 냉정한 평가와 함께 내가 지금 단정적 선입관에 사로잡혀 변화를 주저하며 사는지, 늘 새로운 하나님의 여정에 이끌리어 사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예상치 못한 삶의 신앙고백은 늘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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