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에서 바울이 강조한 내용은 삶과 죽음입니다. 그 경계가 극명해 보이지만, 바울은 이 두 개념을 일치하고자 노력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죽음이 두렵지 않지만, 그렇다고, 육신의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육신으로 바울이 교회와 함께하면 큰힘이 될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의미있는 말을 남깁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믿음과 고난을 얻는 특권을 얻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특권이랄것도 없는 어쩌면 그리스도인 되는 것을 딱 막아서는 문장입니다.
잠시 머뭇하며 바울의 속내를 살펴보면, 곧 죽음앞에선 바울의 간절힘이 베어있습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쓴 옥중서신입니다. 마지막 옥중서신이라는 의미는 죽음에 가장 가까운 바울의 감정이 섞여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죽음에 가까운 이야기와 함께 삶을 이야기하고,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고난이 비켜서지 않음을 이야기합니다. 서로 극명한 이 두개념은 묘하게 어울립니다. 한국교회는 교단별로 총회로 여러결정을 세워가는 시간입니다. 여전히 여성목회자를 허락하지 않았던 교단은 여전히 강력히 여성목사안수를 반대했고, 점점 교회밖과 선을 극명하게 그어서 자신을 보존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내용들이 결정되었습니다. 이단의 기준을 강화하고 교회의 문을 더 좁게 만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이런 결정하는 분들은 반평생이상을 사신분들입니다. 교단의 비전과 운명을 결정하는 혹은 거창하지 않아도 다음세대를 위한 전도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것보다, 누려온것을 든든히 지켜보려는 의지가 강합니다. 어떤 교단은 교회학교아이들이 줄어드니 출산을 장려하자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뭐 그럴수 있습니다. 단순하고도 효과적인 결정이라고 여길수 있습니다. 교회는 갈등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묶인것을 풀어내는 평화의 손길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그토록 갈등하는 현장에 빛과 소금을 보여주고, 강하게 갈등하는 현장에 화합을 선언하는 공동체 이어야합니다. 죽음앞에서도 삶을 이야기하고 삶 앞에서도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충만한곳에 고난받는 자들을 향한 마음으로 가득해야하고, 고난속에서는 믿음의 능력을 보여야합니다. 교회역사상, 종교개혁 500년이 지났습니다. 대부분 종교개혁이 일어난후 500년이 지날때 교회는 가장 큰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교회의 진가는 위기일때 발휘되어야합니다. 이시대 목사로, 성도로 살아가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교회쟁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너머의 고통의 현장까지 우리의 삶이 닿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믿는자의 능력이란 이런것입니다. 믿는자의 기적이란 이런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고백은 곧 우리삶 너머에 있을 고난에 내 삶을 동참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이 고난이다 이 명제를 반드시 기억하는 것... 이 노력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